2025-01-07
(머니투데이, 2025년 1월 7일)
작년 말 공정거래위원회가 80개 공시대상기업집단 소속 2899개 회사를 대상으로, 총수 일가의 경영 참여 현황 및 소수주주 이익 보호를 위한 제도 도입 현황에 대해 발표한 ‘2024년 공시대상기업집단의 지배구조 현황’에 따르면, 총수 일가가 법적 책임에서 자유로운 미등기임원으로 근무하는 사례는 증가하고, 소수주주의 의결권 강화를 위한 집중투표제 도입은 극히 저조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상정 안건의 원안 가결률이 무려 99.4%에 달하여, 이사회는 여전히 사실상 ‘거수기’ 역할을 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지금까지 많은 지배구조 개선이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독립적인 내부감사 부서의 설치, 주주총회 4주 전 소집공고 실시, 이사회 의장과 대표이사 분리 등도 여전히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결국 현재 우리나라 대기업의 지배구조는 총수 일가 등 지배주주에게는 매우 유리하지만, 소액주주를 위한 제도 도입은 아직도 요원하여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평가다.
특히 가장 심각한 문제는, 소수주주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집중투표제를 도입한 곳이 단지 13개에 불과하며, 그나마 실제로 실행한 사례는 2년 연속 단 1건에 그쳤다는 것이다. 집중투표제는 복수의 이사를 뽑을 때 소액주주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이사가 선임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1998년 도입된 제도로, 선임하려는 이사의 수만큼 의결권을 한꺼번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투표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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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대주주가 60주, 소액주주가 40주를 보유한 A라는 회사(총 발행 주식 수 100주)에서 3명의 이사를 뽑으려 하는데, 대주주가 갑, 을, 병 3명의 이사 후보를 추천하고, 소액주주가 정, 무 2명을 추천해서 전체 후보가 5명이 됐다고 가정해 보자. 이런 상황에서 단순투표제로 이사를 선임한다면, 3명 모두 대주주가 추천한 갑, 을, 병이 이사로 선임될 수밖에 없다. 단순투표제에서는 ‘갑 이사 선임에 대한 찬반투표’, ‘을 이사 선임에 대한 찬반투표’ 등 후보 1명씩 별도로 진행된다. 그렇게 되면, 60% 지분을 갖고 있는 대주주 뜻대로 갑, 을, 병 3명 모두 이사로 선정된다. 소액주주가 40%의 지분을 갖고 있어도 3명 중 단 1명도 이사로 선정할 수 없다. 소수주주의 의견은 철저히 배제되는 것이다.
이러한 불합리함을 극복하고 소액주주의 권리를 보장하고자 만들어진 제도가 집중투표제다. 위 사례에서 집중투표제가 시행되면, 대주주는 180의결권(60주X3명)을 한꺼번에 쓸 수 있고 소액주주는 120의결권(40주X3명)을 사용할 수 있다. 주주들은 이 의결권을 원하는 후보 1명에게 집중시키거나 여러 명에게 골고루 나누어서 투표할 수도 있다. 지배주주는 자신들이 추천한 후보를 모두 선임하기 위해 180표를 분산할 수밖에 없으나, 소액주주들은 극단적으로 120표를 한꺼번에 한 후보자에게 몰아준다면 득표 순에 의해 소액주주가 추천한 후보가 이사에 선정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집중투표제가 도입된 작년 KT&G 주총에서 소수주주가 추천한 사외이사가 선임될 수 있었다. 또한 집중투표제로 치른 JB금융지주 주총에서는 예상을 깨고 2대 주주가 추천한 2명이 득표순으로 1, 2위를 차지하며 사외이사에 선임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소수주주나 재무적 투자자들은 회사의 투명성 제고와 지배구조 개선에 긍정적 역할을 기대하면서 적극적으로 도입을 희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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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대부분의 지배주주들은 집중투표제 도입을 꺼리고 있다. 작년에 공시된 자산총액 1조 원 이상인 366개 코스피 상장기업의 ‘기업지배구조 보고서’에서도 4%에 불과한 집중투표제 채택률이 가장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었다. 현재 집중투표제는 정관에서 배제하지 않는 한 활용할 수 있는 형태로 상법에 도입되었으나, 대다수의 회사가 정관에서 집중투표제를 배제하면서 소액주주 권한이 미미해지자,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하는 데 힘이 실리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지배주주 입장에서는 해외 투기자본에 악용되어 기업 경영에 커다란 지장을 초래한다며 집중투표제 의무화를 반대하고 있다.
이처럼 집중투표제에 대한 논란이 뜨거운 가운데, 해를 넘기며 경영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고려아연에서도 집중투표제가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됐다. 이번 달 말 개최 예정인 고려아연 임시주총 안건인 집중투표제에 대해 사모펀드 MBK파트너스가 이의 제기를 한 것이다. 임시주총을 앞두고 고려아연 주주인 유미개발이 제기한 집중투표제 도입을 위한 정관 개정안 제안과 집중투표 방식의 이사 선임 청구를 이사회가 모두 수용하자, MBK가 ‘집중투표제 방식으로 이사를 선임’하는 의안 상정을 금지해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제기한 것이다. 집중투표제를 도입하자는 의안 자체엔 문제가 없으나, 이 의안이 가결된다는 전제하에 상정한 이사 선임안은 위법의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사회의 독립성 강화 등 ‘지배구조 개선’을 명분으로 적대적 M&A를 시도하고 있는 MBK 파트너스가 소액주주 보호 제도인 집중투표제 도입에 반대 의견을 개진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하고 있다. 오히려 집중투표제 조기 도입으로 소액주주의 권한을 강화하고 이사회의 독립성을 주장해야 하는데, 지금 고려아연의 지분구조에서 집중투표제를 도입하면 오히려 소수주주들이 이사를 선임할 수 없다는 다소 어색한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이다.
자산총액이 2조 원 이상인 상장회사는 집중투표제 관련 정관을 변경할 경우 3% 이상의 지분을 보유한 주주는 3%까지밖에 의결권을 행사하지 못한다. MBK 컨소시엄은 40.97% 지분으로 최대주주 자리에 있다. 그러나 3명의 주요 주주가 모두 3% 이상을 보유하고 있다. 그래서 집중투표제가 채택되면, 총 13.25%밖에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다. 반면 최윤범 회장 측은 53명이 17.5%를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3% 이상 소유한 주주는 없다. 그래서 단순투표제 하에서는 절대적으로 MBK가 유리하지만, 집중투표제가 도입되면 최회장 측이 오히려 우위에 선다. MBK가 결사적으로 집중투표제를 막아야 하는 실질적인 이유다.
※ 기고 전문: [유효상 칼럼] 왜 집중투표제 도입이 시급할까 – 머니투데이